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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 POEMS

천사, 신해욱 나는 등이 가렵다. 한 손에는 흰 돌을한 손에는 우산을들고 있다. 우산 밖에는 비가 온다. 나는 천천히어깨 너머로 머리를 돌려등 뒤를 본다. 등 뒤에도 비가 온다. 그림자는 젖고나는 잠깐슬퍼질 뻔한다. 말을 하고 싶다.피와 살을 가진 생물처럼.실감나게. 흰 쥐가 내 손을떠나간다. 날면,나는 날아갈 것 같다. 더보기
단 하나의 이름, 이제니 얼어붙은 종이 위에서 나는 기다린다얼음의 결정으로 떠오르는 기억의 물처럼발설하지 않은 이름을 대신할 풍경이 몰려올 때까지 월요일에 나는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지아니 화요일 아니 수요일 아니 목요일 아니 금요일이미 잃었는데도 다시 잃고야 마는 요일의 순서들처럼수면양말에 담긴 너의 두 발은 틀린 낱말만 골라 디뎠지 이곳은 너무 어둡고 너무 환하고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이 흰색을 이 검은색을 고아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사랑하는 나의 고아에게오늘의 심장은 어제의 심장이 아니란다건초더미라는 말은 녹색의 풀이 한 계절을 지나왔다는 말세계의 끝으로 밀려난 먼지들의 춤도 이와 마찬가지소리가 되기 위해 모음이 필요한 자음들처럼 이제 그만 울어도 좋단다 말없는 자매들처럼 돌아누워 나누는 애도의 목례검은 종이 위에 검은 .. 더보기
생일, 이응준 온 우주의 별자리들을 다 헤매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나는 나의 죄를 담은 밤하늘을 향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그러자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더보기
꽃멀미, 김충규 새가 숨어 우는 줄 알았는데 나무에 핀 꽃들이 울고 있었다 화병에 꽂으려고 가지를 꺾으려다가 그 마음을 뚝 꺾어버렸다 피 흘리지 않는 마음, 버릴 데가 없다 나무의 그늘에 앉아 꽃 냄새를 맡았다 마음속엔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곳이 여럿 있었다 내 몸속에서 흘러내린 어둠이 파놓은 자리, 오랜 시간과 함께 응어리처럼 굳어버린 자국들 그 자국들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때 깊고 아린 한숨만 쏟아져 나왔다 꽃 냄새를 맡은 새의 울음에선 순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의 힘으로 새는 사나흘쯤 굶어도 어지러워하지 않고 뻑뻑한 하늘의 밀도를 견뎌내며 전진할 것이다 왜 나는 꽃 냄새를 맡고 어지러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늘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구름이 이동하고 있었다 구름이 머물렀던 자리가 움푹 패여, 그 자리에.. 더보기
비의 무게, 이현승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비가 내린다끼리끼리 또 함께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간옥수동엔 비가 오고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똑같이 비를 맞아도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은 일을 당해도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처마 끝의 물줄기를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리는 빗속에서더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이미 젖은 것들이고젖은 것들만이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더보기
천사에게, 김행숙 천국에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천국에도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가, 이 세계에도 있는 것이 천국에도 있으면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아, 달빛은 메아리 같아. 꼬리가 흐려지고......떨리는......빛과 메아리. 달빛은 비밀을 감싸기에 좋다고 생각하다가, 달빛은 비밀을 풀어헤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달빛은 스르르 무릎을 꿇기에 좋은 빛, 달빛은 사랑하기에 좋은 빛, 달빛은 죽기에도 좋은 빛, 오늘밤은 천사의 날개가 젖기에도 좋은 빛으로 온 세상이 넘쳐서, 이 세계 바깥은 없는 것 같구나. 우리 도시의 지하에는 커브를 그리며 돌아다니는 열차가 있고, 열차에는 긴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보기
사라지는 포옹, 이이체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있다. 눈 덮인 산허리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차가운 손길에 나는 몸을 움츠린다. 너는 칡넝쿨로 너를 묶은 채 웅크려 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빽빽하게. 솔잎들은 너를 찌를 듯이 흙바닥에서 주춤주춤. 나는 나무의 뒤편들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너는 상처를 상상하며 운다. 청설모와 다람쥐들이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 우리 아스팔트 고향에서 들려오는 폐건물에서의 메아리울음, 그 수많은 생략들. 묶어줘. 나를 풀지 말아줘. 얼마나 많은 흉터들을 건너갔는지. 너는 울면서 내게 울지 말라고 말한다. 허물어진 도시의 먼지들이 이 숲을 뻐끔뻐끔 메워 오고. 모두가 너를 잘못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 속삭인다. 눈가루들로 희뿌옇게 앉은 저 멀리 산 중턱, 너는 메아리를 닮아 차츰 사라져 간다. 나.. 더보기
흔적들, 최서진 나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때의 얇은 날개짓은 작별인사처럼 고요하다 따뜻하고 싶은 상상만으로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다가갈 때마다 속눈썹부터 젖고 마는 그늘로만 날아야하는 나비, 보폭을 견딜 수 없을 때 참을성을 엎지르며 날아가는 나비들 나비의 허공에 뜨거운 바람이 불고 무엇이든 녹이는 세계에서 멀리 날아갈 수 있을까, 나비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나비의 날개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나의 한쪽을 규정지으며 달아나는 나비 저만치 나비, 나비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눈길을 주고 두 눈을 비비면 손끝 따라 전하지 못한 문장들이 식물처럼 돋아나고 그 곳으로부터 까만 씨앗이 결핍처럼 맺힌다 다시 봄을 가지면 너는 어둠을 털고 와줄까 금지된 세계에 침을 섞으며 사라져 가는 오후 외로운 안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