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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 POEMS

물의 방, 이혜미 파문이 시작되는 곳에 두 개의 원이 있었다. 테를 두르며 퍼져나가는 동그라미 동그라미들. 너와 나는 끊임없이 태어나는 중인 것 같아, 물속에 오후를 담그고 우리의 방은 빛나는 모서리를 여럿 매달았다. 수면을 향해 아무리 불러도 충분하지 않은 노래였고, 그저 유영하기 위해 한껏 열어둔 아가미였지. 그래 우리는 만져질수록 흐려지고 미천해지는 병에 걸렸어. 투명한 벽에 이마를 짓찧으며 여러 날을 낭비했었다. 단단한 눈물을 흘렀고, 얼굴이 사라지는 대신 아름답게 구부러진 다리를 얻었다. 유리 너머로 흐리던 색들이 우리 몸에서 묻어난다. 짧고, 하얀 소리가 났다. 더보기
환생여행, 이이체 실낙원에, 몸은 몸을 비우고서야 돌아간다.비가 내린다.이 길 위에서사람들은 각자 입 없는 신을 얻는다. 발을 가졌던 전생이 서러운 뱀,나는 그것으로 마임을 한다. 인간은 원래 모두 가볍다.무거운 인간은 나뿐이다. 더보기
한편, 유희경 눈물이 울고 눈은 울지 않는다나보다 먼저 소요가 일어났다떨고 있다 떠는 것이 있다내게 고인 것들이 불쌍하지만,어차피 위선 아니면 위악용서받을 것이 아니다경계가 경계를 경계하고숫자를 세는 일은 지겹지 않다끝나지 않으면 잃어버린 거지그런 건 찾지 않는 게 좋다먼 외국의 일은 잊어도 할 수 없다힘은 무겁다 이름은 가깝고,누구나 너무 자주 생각한다세계는 생각의 덩어리진 형태생활은 오쟁이 진 모습 그대로흑백의 거리가 어둑어둑해진다비극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나는 결론의 집에서 산다[출처] 유희경 시인의 시 '한편'|작성자 yhjoo1 더보기
분홍 설탕 코끼리, 이제니 분홍 설탕 코끼리는 발에 꼭 끼는 장화 때문에 늘 울고 다녔다. 발에 맞는 장화를 신었다 해도 울고 다녔을 테지. 어릴 때부터 울보였고 발은 은밀히 자라니까. 두번째 분홍 설탕 코끼리가 말했다. 그렇다고 코끼리가 두 마리 있는 건 아니었다. 설탕이 두 봉지 있는 것도 분홍이 두 바닥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도 없었지만 분홍 설탕 코끼리는 오늘도 언덕에 누워 설탕을 먹고 분홍에 대해 생각했다. 코끼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나. 아주 오래전 일이라 잊었나. 설탕, 하고 발음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바보, 모든 설탕은 녹는다. 뚱뚱해지는 건 시간문제. 계절이 지나자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설탕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풍선 풍선이 되었다. .. 더보기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나 잠깐만 죽을게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겨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 더보기
공생, 김상미 시는 시인의 가슴을 파먹고시인은 시의 심장을 파먹고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파먹고가난한 자는 부자들의 동정을 파먹고죽음은 삶의 흰 살을 파먹고삶은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의 숨결을 파먹고태양은 쉼 없이 매일매일 자라나는 희망을 파먹고희망은 너무 많이 불어 터져버린 일회용 푸른 풍선 같은하늘을 파먹고 더보기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 김소연 미리 무덤을 팝니다 미리 나의 명복을 빕니다 명복을 비는 일은 중요합니다 나를 위한 너의 오열도 오열 끝의 오한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저승에서의 지복도 나는 꿈꾸지 않습니다 궁극이 폐허입니다 한 세기가 지나갈 때마다 한 삽씩 뜨거운 땅을 파고 이 별의 핵 지대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너를 만나길 지나치게 바랐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안에 들어가 미리 누워봅니다 생각보다 깊고 아득합니다 그렇지만 무섭고 춥습니다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좀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더보기
시작, 박지혜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 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곳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