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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 POEMS

사라지는 포옹, 이이체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있다. 눈 덮인 산허리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차가운 손길에 나는 몸을 움츠린다. 너는 칡넝쿨로 너를 묶은 채 웅크려 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빽빽하게. 솔잎들은 너를 찌를 듯이 흙바닥에서 주춤주춤. 나는 나무의 뒤편들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너는 상처를 상상하며 운다. 청설모와 다람쥐들이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 우리 아스팔트 고향에서 들려오는 폐건물에서의 메아리울음, 그 수많은 생략들. 묶어줘. 나를 풀지 말아줘. 얼마나 많은 흉터들을 건너갔는지. 너는 울면서 내게 울지 말라고 말한다. 허물어진 도시의 먼지들이 이 숲을 뻐끔뻐끔 메워 오고. 모두가 너를 잘못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 속삭인다. 눈가루들로 희뿌옇게 앉은 저 멀리 산 중턱, 너는 메아리를 닮아 차츰 사라져 간다. 나를 풀면 위험해. 너는 내게 손 내미는 대신 말을 내건다. 떨어지려는 것처럼 흔들리는 도토리들. 칡넝쿨이 더 세게 너를 옥죄고, 나는 너를 풀지 못한다. 아련해져 가는 너를 잡아보려고 손을 뻗으면, 선은 손에서 멀어져 가고 손은 선에 닿지 않고. 바람을 지나쳐 보내며 신기루를 믿고 싶다고 말한다.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상처가 없는데 아프다. 눈 감은 내 눈 앞에 눈 내리는 풍경이 펼쳐지고.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에서 너를 안고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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