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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약들이 녹는다는 것, 김지녀 창문들이 내 주위를 빙빙 돌며휘파람을 분다신사 숙녀 여러분, 밤이 돌아왔습니다복도를 지나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이 밤의 병명은 무엇입니까잠깐 자고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길게 하품을 하는 나의 입속은 한겨울 비닐하우스처럼 후덥지근해쫄쫄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물에선 약냄새가 진동하는데낡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는 밤이여, 오늘은수용소 문학을 이해할 것 같은 날이기에소각장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것을 위로할 겨를이 없네꿈을 꾸고 겁을 먹고 토사처럼 몸이 무너져 내려도나는 영생을 믿지 않고윤회 또한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이웃들의 침대 위에서믿음은 쉬지 않고 중얼거린다누가 저 사람 입 좀 다물게 할 수 없어?가래침처럼, 믿음은 왜 저렇게 끈적한 건지내 쓰레.. 더보기
나의 잠은 북쪽에서부터 내려온다, 김지녀 북쪽을 모르면서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감염된 계절이에요 팔과 다리를 오므리고 한덩어리의 어둠으로 녹아가는 중입니다 크고 검은 고래의 뼈를 생각합니다 아늑한 동굴입니다 얼마나 남았을까요?나는 벤젠처럼 냄새가 없어요창문을 열어놓고 자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을 지우며휘파람을 불면서 아래로더 아래로, 추락하는 꿈속에서찬바람이 불어, 나를 모르는 사람의 눈동자에서 충혈된다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것빗속에서도 젖지 않고 메말라가는 곳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뻗어가야 하는 동굴일까요? 닫힌 서랍 속에서북쪽의 태양이 길어지고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만 태어나고 북쪽을 모르면서 북쪽이 그리웠다 나는 조금 더 어두워졌다 더보기
물체주머니의 밤, 김지녀 보이는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내 몸의 절반은 위가 되었다 가끔헛배를 앓거나묽어진 울음을 토해내지만송곳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내벽의 주름들이굶주린 항아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안쪽으로 쑥, 손을 넣어 악수하고손끝에 닿는 것들을 위무하고 싶은, 밤나는 만질 때에만 잎이 돋는 나무조각이거나따뜻해지는 금속에 가깝다 내 안에 꽉 들어찬 것은 희박하고 건조한 공기 기침을 할 때 튀어나오는 금속성 소리날카롭게 찢어진 곳에서, 푸드득 날아간 새는 기침의 영혼인가한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에소멸하는 빛과 어둠, 사이에서 나는 되새김질을 반복했다, 반복해도소화되지 않는 두 입술 사물들의 턱뼈가 더욱 강해진다밧줄처럼 허공에 매달린 나는 공복이다 더보기
지엽적인 삶, 송승언 비닐하우스에는 빛이 가득하다 현기증이 난다 너는 거대한 사물에 물을 뿌리고 있다 그것이 뭐냐고 물었다그것은 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꽃이 아니다꽃은 색이 있고 향기가 있다 무더기로 살다가 무더기로 죽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하나이고 색이 없다 살지도 죽지도 않고 무한히 자라난다 요즘은 잘 사냐고 물었다 잘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요즘은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다고 했다 꽃이 아닌 그것이 비닐하우스를 채웠다 현기증이 난다그런데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곳에는 빛이 가득하다 몸을 잃을 만큼 물을 뿌렸다물이 흩어진 곳에서 어둠이 번식한다 더보기
시집, 김언 작곡하듯이 쓸 것.3차원의 문제도 4차원의 문제도 아닐 것.처음과 끝이 반드시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끝까지 듣게 할 것.시간이 아닐 것.어떻게 잡아챌 것인가. 그 종이의 다른 차원을.그 노래를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음악을 대할 것.소리 나는 대로 작곡하는 버릇을 버릴 것.어느 좌표에도 찍히지 않는 점이 불가능할 것.반드시 찍힌다는 신념을 의심하지 말 것.차원의 문제는 신념의 문제에서 비롯될 것.그 새벽의 전혀 다른 도시를 보여줄 것.어느 공간에서도 외롭지 않을 문장일 것.어느 시간대를 횡단하더라도 비명은 아닐 것.고함도 아닐 것. 그것은 확실히 음악일 것.작곡하듯이 되풀이할 것.음표를 지울 것.그리고 쓸 것.그것의 일부를 묶어 모조리 실패할 것.한 푼의 세금도 생각하지 말 것.오로지 쓸 .. 더보기
나의 고아원,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더보기
함부로 애틋하게, 정유희 나는 네가 비싸도 좋으니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싸구려라도 좋으니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값비싼 거짓이거나 휘황찬란한 가짜라면 나는 네가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기꺼이 환하게 속아넘어가주마 함부로 애틋한 듯 속아넘어가주마 더보기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中 뭐 희미해진 건 그의 이름만이 아니다. 습기가 그려놓은 그 벽화 아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얘기들, 지나고 보니 지독히 가벼웠던 맹세들, 새끼 원숭이들처럼 서로를 핥으며 맛보았던 짭조름한 땀의 미각, 사랑하고 다투고 다시 사랑했던 그토록 달콤했던 투쟁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도 이 사진처럼 제 색깔과 촉감을 잃어버린 기억 저편에서 나리꽃 빛처럼 몽롱할 뿐이었다. 필름을 망가뜨린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지독했던 습기 탓일 것이다. … 존재의 의미를 재는 내 속의 저울 눈금을 조정하고 나자 찾아온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 [10-11p] “넌 언젠가 개미를 닮고 싶다고 말했지. 그들은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다고. 패배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지난 시간의 일로 상처받..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