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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무게, 이현승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비가 내린다끼리끼리 또 함께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간옥수동엔 비가 오고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똑같이 비를 맞아도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은 일을 당해도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처마 끝의 물줄기를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내리는 빗속에서더이상 젖지 않는 것들은이미 젖은 것들이고젖은 것들만이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더보기
천사에게, 김행숙 천국에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천국에도 있는 것이 이 세계에도 있으면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다가, 이 세계에도 있는 것이 천국에도 있으면 나쁜 것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아, 달빛은 메아리 같아. 꼬리가 흐려지고......떨리는......빛과 메아리. 달빛은 비밀을 감싸기에 좋다고 생각하다가, 달빛은 비밀을 풀어헤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 달빛은 스르르 무릎을 꿇기에 좋은 빛, 달빛은 사랑하기에 좋은 빛, 달빛은 죽기에도 좋은 빛, 오늘밤은 천사의 날개가 젖기에도 좋은 빛으로 온 세상이 넘쳐서, 이 세계 바깥은 없는 것 같구나. 우리 도시의 지하에는 커브를 그리며 돌아다니는 열차가 있고, 열차에는 긴 의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보기
사라지는 포옹, 이이체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게 있다. 눈 덮인 산허리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차가운 손길에 나는 몸을 움츠린다. 너는 칡넝쿨로 너를 묶은 채 웅크려 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빽빽하게. 솔잎들은 너를 찌를 듯이 흙바닥에서 주춤주춤. 나는 나무의 뒤편들을 오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너는 상처를 상상하며 운다. 청설모와 다람쥐들이 나무 아래로 내려오면, 우리 아스팔트 고향에서 들려오는 폐건물에서의 메아리울음, 그 수많은 생략들. 묶어줘. 나를 풀지 말아줘. 얼마나 많은 흉터들을 건너갔는지. 너는 울면서 내게 울지 말라고 말한다. 허물어진 도시의 먼지들이 이 숲을 뻐끔뻐끔 메워 오고. 모두가 너를 잘못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 속삭인다. 눈가루들로 희뿌옇게 앉은 저 멀리 산 중턱, 너는 메아리를 닮아 차츰 사라져 간다. 나.. 더보기
흔적들, 최서진 나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때의 얇은 날개짓은 작별인사처럼 고요하다 따뜻하고 싶은 상상만으로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 다가갈 때마다 속눈썹부터 젖고 마는 그늘로만 날아야하는 나비, 보폭을 견딜 수 없을 때 참을성을 엎지르며 날아가는 나비들 나비의 허공에 뜨거운 바람이 불고 무엇이든 녹이는 세계에서 멀리 날아갈 수 있을까, 나비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나비의 날개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눈을 감으면 나의 한쪽을 규정지으며 달아나는 나비 저만치 나비, 나비가 사라져간 방향으로 눈길을 주고 두 눈을 비비면 손끝 따라 전하지 못한 문장들이 식물처럼 돋아나고 그 곳으로부터 까만 씨앗이 결핍처럼 맺힌다 다시 봄을 가지면 너는 어둠을 털고 와줄까 금지된 세계에 침을 섞으며 사라져 가는 오후 외로운 안과.. 더보기
블랭크 하치, 이제니 블랭크 하치. 내 불면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너도 네 얼굴을 보여줄까.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썼다 모든 것을.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이미 벌써.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너에 대한 문장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너는 또다시 한줌의 모래알을 흩날리며 떠나는 흰빛의 히치 하이커.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 네 시원을 찾아 끝없이 나아가는 블랭크 하치. 언제쯤 너에게 가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네가 나의 눈을 태양이라고 불러준 이후로 나는 그늘에서 나왔지. 블랭크 블랭크. 태양의 눈은 마흔다섯개. 나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날들로 부터 아홉 시간 뒤였다. 이후로 나는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마음을 읽.. 더보기
그 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더보기
밝은 날, 김용택 되돌아올 자리도가서 숨을 곳도 없이미친 채로 떠도는너무 청명한 날 해가 무겁다 더보기
이웃 사람, 김행숙 곧 가스불을 꺼야 할 독신자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이다. 고깃국물이 졸아들고 검은 간장 한 방울처럼 진해지는 것이다. 불꽃 냄비처럼 모든 손잡이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란 가스불을 끄고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음식을 먹고 천천히 그릇을 씻는 것이다.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고 드디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 동네에서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앞발을 감추고 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