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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 POEMS

블랭크 하치, 이제니 블랭크 하치. 내 불면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면 너도 네 얼굴을 보여줄까.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썼다 모든 것을.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이미 벌써.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너에 대한 문장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너는 또다시 한줌의 모래알을 흩날리며 떠나는 흰빛의 히치 하이커.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 네 시원을 찾아 끝없이 나아가는 블랭크 하치. 언제쯤 너에게 가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네가 나의 눈을 태양이라고 불러준 이후로 나는 그늘에서 나왔지. 블랭크 블랭크. 태양의 눈은 마흔다섯개. 나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날들로 부터 아홉 시간 뒤였다. 이후로 나는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고 마음을 읽.. 더보기
그 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더보기
밝은 날, 김용택 되돌아올 자리도가서 숨을 곳도 없이미친 채로 떠도는너무 청명한 날 해가 무겁다 더보기
이웃 사람, 김행숙 곧 가스불을 꺼야 할 독신자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이다. 고깃국물이 졸아들고 검은 간장 한 방울처럼 진해지는 것이다. 불꽃 냄비처럼 모든 손잡이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란 가스불을 끄고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음식을 먹고 천천히 그릇을 씻는 것이다.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고 드디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 동네에서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앞발을 감추고 발.. 더보기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 정화진 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장독마다 물이 가득 차 있고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지 뭐예요 아가씨, 이상한 꿈이죠 아이들은 창가에서 눈 뜨고 냇물을 끌고 꼬리를 흔들며 마당가 치자나무 아래로 납줄갱이 세 마리가 헤엄쳐 온다 납줄갱이 등지느러미에 결 고운 선이 파르르 떨린다 아이들의 속눈썹이 하늘대며 물 위에 뜨고 아이들이 독을 가르며 냇가로 헤엄쳐 간다 독 속으로 스며드는 납줄갱이 밤 사이 독 속엔 거품이 가득찬다 치자향이 넘친다 그건 사실이 아니잖아요 새언니, 그건 고기알이었어요 냇가로 가고 싶은 아이들의 꿈 속에 스며든 것일 뿐 장마는 우리 꿈에 알을 슬어 놓고 아이들을 눈 뜨게 하고 향기로운 날개를 달게 하고 아이들은 물 속에서 울고불고 날마다 빈 독을 마당에 늘어 놓게 하고 더보기
너는 묻는다, 이수명 숲 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화분을 들고 서 있었는데 화분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말했지 화분은 단단하지 않다고 네가 붙잡는 대로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있다고 너는 말했지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시신이 텅 비어 있어서 시신에는 아무것도 심어져 있지 않아서 시신이 없다. 처음에 없다. 하지만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여태 숲속에 있어서 숲을 늘리고 늘려서 그래 숲을 들치고 마침내 시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시신으로 나를 몰아내는 것이다. 나는 없다. 처음에 없다. 시신이 웃는다. 숲 속에서 네가 나왔는데 너는 누구의 시신인가 너는 화분을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묻는다. 더보기
다정과 다감, 황인찬 한 사람이 자꾸 공원을 헤매는 장면을 상정해 본다 두 사람이 물 위에서 노를 젓는 장면을 병치해 본다 한낮의 공원, 하고 떠올리면 떠오르는 것들을 한낮의 공원이라는 말이 대신해 주고 있다 고수부지의 두 사람, 바글대는 여름의 날벌레들, 모두가 내린 버스에서 홀로 내리지 않는 한 사람 같은 그러한 장면이 이 시엔 없고 영화를 보는 장면이 갑자기 끼어든다 영화 속에서는 사람들이 죽는다 원래 죽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죽는다 영화 밖에서도 사람은 죽지만 거기에는 자막이 없다 이 시에는 다른 어떤 시들처럼 사람이 등장하고, 그 사람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공원으로 나오면 잔디를 밟지 마시오, 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것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쓰인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현대의 한국어 문장은 왼.. 더보기
이은규,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