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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2015 맑스코뮤날레 발표 원고 中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사회를 말하는 사회』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표현하는 여러 이름을 나열한다. 위험사회, 피로사회, 허기사회, 잉여사회, 분노사회, 절벽사회, 분열사회 등 부정적 의미의 이름들이다. 우리 사회가 고통의 과잉을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다. 거기에 이름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미안하지만 가장 많은 이의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이름은 불안사회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승자도 패자도,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노인도 젊은이도, 청소년도 어린이도, 모두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의 보편성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안개다. 안개는 기체성과 액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불안은 기체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며 액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흘러들어 흡착된다. 그래서 개인적 삶의 불확실성, 사회적 관계의 불안정성, 타자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불안을 음습한 안개로 묘사한 영화나 문학이 많다. 그 중에 기형도 시인의 시《안개》는 오늘의 불안사회를 성찰하게 하는 예리한 통찰로 가득하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안개처럼 불안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처음 얼마 동안은 경계하지만, 곧 습관을 붙여 그 체제와 식구가 되고, 결국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니며 사는 삶. 시인이 1985년에 쓴 이 시는 30년 후인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불안사회를 예언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안개》의 마지막 연의 한 구절은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면서 공모자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예리하게 표현한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주식을 갖고 있는 우리의 삶은 두 가지 규칙 아래 작동한다. 첫째, 남과 경쟁해서 이기는  강자만이 홀로 살아남는 강자독생(强者獨生)이다. 생존하려면 남보다 앞서야 하고, 옆 사람은 밀쳐야 하고, 뒤처진 사람은 내팽개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리얼리티 TV 쇼가 인기인 이유는 강자독생의 서바이벌 게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상을 ‘리얼하게’ 압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출연자가 서로 배려하는 것보다 배신하고 배척하는 것에 더 열광하며 폭소한다. 규칙은 단순하다. 내가 생존하려면 남을 섬멸해야 한다. 미국의 한 서바이벌 게임 쇼의 제목은 Wipeout(섬멸)이다. 이런 생존경쟁 사회에서는 이긴 자도 진 자도 모두 불안하다. Play Again! 게임의 끝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남이야 어찌 되든 자기 홀로 살아나갈 법을 꾀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신자유주의의 “안개와 식구”가 된 사람들은 사회적 고통을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성공도 실패도, 부도 가난도, 행복도 불행도 모두 개인의 책임이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계명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더 이상 사회가 구원해주기를 바라지 말라”이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이며 수호자였던 마거릿 대처는 아예 “사회라는 것은 없다. 개인들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라고까지 했다. 서로를 돌보는 ‘사회’는 사라지고 불안한 외톨이들의 쓸쓸한 ‘집합’만이 존재한다.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사회가 사라진 사회의 개인들은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결국 “안개의 빈 구멍” 속에 외롭게 갇힐 뿐이다. 불안의 안개 속에서 더욱 불행해진 사람들은 외로움과 괴로움에 “경악”한다.    


상황의 악화, 주체의 약화


불안의 안개는 기형도 시인이《안개》를 쓴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무겁게 깔려 있지만, 오늘의 안개는 더 짙고 축축하다. 상황은 악화되고 주체는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상황의 악화란 초국가적 자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쉽게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조성된 것을 말한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세계의 모든 국가를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개조했다. 국가 주도의 각종 규제완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산업의 사유화는 자본의 ‘무비자’ 입출국을 위한 조건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국가권력과 자본을 구분해서 말하지만 오늘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권력이다. 지역적 국가권력은 ‘슈퍼갑’인 지구적 자본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자본이 슈퍼갑이 된 시대상황에서 ‘을’인 노동자와 시민은 사회적 약자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주체의 약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갑-을 관계의 불평등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이 갑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을이었다. 문제는 을-을 관계의 변화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는 약자의 ‘계급적 연대’가 있어 자본의 ‘갑질’을 어느 정도 제약할 수 있었지만, 오늘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이 개인으로 산산이 조각나버리면서 을-을 연대가 현저히 약해졌다. 즉 주체의 약화는 개인주의의 일상화, 심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사회적 약자의 저항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안개처럼 내려 앉아있는 개인주의는 약자가 신자유주의에 투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약자는 비일상적, 일시적 저항의 공동체에 개인으로 참여하고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와 개인으로 살아간다. 문제는 그 일상이 강자독생과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적 규칙에 지속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상의 변혁 없는 비일상적 저항만으로는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주체의 약화는 다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개인으로 파편화된 을은 슈퍼갑의 횡포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대를 상실한 사회적 약자의 저항이 강할 리 없다. 그래서 바우만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자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들의 약점을 보여주고 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방법뿐”이라고 한다. 지난 해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70미터 높이의 굴뚝에 올랐다고 했던 것은 주체의 약화를 비통하게 입증하는 동시에, 그래서 더욱 절박하게 약자의 연대를 호소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적 불안사회는 개인화된 사회적 약자에게는 ‘참사사회’다. 자본의 안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약자의 안전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참사사회의 가장 끔찍한 경험은 2014년 4월 16일 아침, 304명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간 세월호 참사다. ‘편안한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안산(安山)’의 아이들을 실은 세월호가 짙은 안개 속으로 떠났다가 침몰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식구인 국가와 자본은 사회적 약자를 구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침몰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강자독생과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 사회가 곧 ‘세월호’라는 진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날, 사회가 침몰했다.  


불안과 종교

 

종교는 수천 년 동안 불안과 씨름해왔다. 인간이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고 평화를 얻게 하는 것이 종교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의 하나였다. 종교가 불안의 병을 어떻게 치유하는지 잘 보여주는 두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선불교의 제2조인 혜가(慧可)의 깨달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성 어거스틴의 회심 이야기다. 


   혜가는 불안의 존재였다. 그는 보리달마(菩提達磨)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은 채 밤새 눈을 맞으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보리달마는 면벽참선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혜가는 자기 팔을 잘라 바치며 가르침을 구한다. 그렇게 해서 보리달마의 제자가 된 혜가는 목숨 걸고 수행하지만 여전히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날, 불안으로 괴로워하던 혜가가 스승에게 애원한다. “스승님, 제 마음이 불안해 죽겠습니다. 제발 제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십시오.” 스승 보리달마가 말한다. “너의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그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겠다.” 혜가가 대답한다. “어디서도 제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보리달마가 말한다. “나는 방금 너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었다.” 그 순간 혜가는 마음이란 것이 본래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평화를 얻는다. 


   그리스도교의 성 어거스틴도 젊은 시절에는 혜가만큼이나 불안한 존재였다. 그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사람에서 사람으로, 학파에서 학파로, 그리고 종교집단을 옮겨 다니며 방황을 계속하지만, 마음의 불안을 없애지 못한다. 어거스틴이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 때는 신에게로 돌아섰을 때였다. 그는 그 경험을 『고백록』의 첫머리에 이렇게 쓴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불안하기만 합니다.” 마음을 신을 향해, 신 안에 온전히 내맡김으로써 평화를 얻은 것이다. 


   불안을 치유하기 위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처방전은 다른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불안의 원인 진단, 처방, 치유의 결과는 같다. 불안은 ‘나’에 대한 집착에서 오며, 불교적으로 말하면, 그 ‘나’를 내려놓을 때,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그 ‘나’를 신에게 내맡길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보리달마의 위 이야기를 안심법문(安心法門), 즉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어거스틴의 고백도 안심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수천 년 동안 불안한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안심의 길로 존재해 왔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내적 안심만으로는 인간이 경험하는 불안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라는 맹자의 가르침처럼 물적 토대가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을 갖기 어렵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의는 불안의 핵심 원인이다. 세계의 종교들이 인간의 내적 안심만이 아니라 외적 안녕에도 관심 가져온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안개와 식구”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시대의 종교는 그 본연의 안녕과 안심의 길이기를 그만두고 있다. 


종교가 된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하청 종파가 된 종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특유의 교리(탐욕과 개인주의), 제의(소비), 신전(시장)을 가진 인류 역사상 가장 광범하고 강력한 ‘종교’다. 이 신자유주의 종교의 힘은 사회구조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도 지배할 만큼 강력하다. 그런데 그 지배 방식은 강제보다는 유혹의 형태를 취한다. 유혹은 여러 종교에서 악의 대표적 작용 방식으로 나타난다. 유대-그리스도교 경전인 성서의「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뱀의 모습을 취한 악마의 첫 활동은 하와와 아담을 유혹하여 신의 뜻을 거스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복음서도 악마가 광야에서 ‘두 번째 아담’인 예수를 돈, 권력, 명예로 유혹한 설화를 전한다. 불교에도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 악마 마라Mara의 세 딸 탄하Taṇhā(갈애), 아라띠Arati(증오), 라가Rāga(탐욕)의 유혹을 받았고, 깨달아 붓다가 된 후에는 세상을 버리고 ‘홀로’ 열반에 들라는 마라의 유혹을 받았다는 설화가 있다. 


    자본주의의 모습을 취한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 핵심 수단은 소비주의다. 태초의 악마가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했다면 오늘의 악마는 “선악과를 사 먹으라”고 유혹한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정체성이 바뀐다.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은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ens,’ 즉 ‘소비자’다. 소비자는 자신의 존재를 소비를 통해 경험하고 입증한다.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nsume, ergo sum.” 소비는 존재의 증명이며 지속이다. 


    소비주의가 악마의 유혹인 이유는, 자본주의의 무한성장을 위해서는 무한소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필요에 따른 소비만 한다면 성장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은 인간이 필요 이상의 소비를 하도록, 그리고 불필요한 것도 소비하도록 유혹해야 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소비의 중심 동기는 장 보드리야르가 일찍이 간파한 것처럼 상품의 사용가치use-value가 아닌 기호가치sign-value다. 인간은 상품의 ‘일부’인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무한소비의 탐욕을 자원으로 삼아 ‘독점 거대종교’로 성장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기존의 종교들을 자신의 ‘하청 종파’로 만드는 데 이르렀다. 종교들은 여전히 교리적, 신앙적 차원에서는 서로 대립하며 갈등하지만, 신자유주의 문화를 따르는 데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안개 속에서는 차이를 분간하기 어려운 법이다. “안개와 식구”가 되어버린 종교들은 신자유주의의 유일절대신인 맘몬Mammon(돈, 물질)을 다른 이름으로 섬긴다.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신자유주의의 계명을 위반하는 종교는 ‘이단’이다. 


    신자유주의의 하청 종파가 된 종교들은 영성을 불안 치유 상품으로 판매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종교가 파는 영성은 불안을 치유하지 않고 망각하게 한다. 그것은 불안을 소비의 욕망으로 대체함으로써 잊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소비의 욕망은 먹어도 먹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에리직톤Erysichton의 허기처럼 만족과 멈춤이 없다. 소비의 욕망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비에 대한 욕망으로 대체될 뿐이다. 소비의 지속과 확대를 통해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소비욕망의 대체 주기를 더 빠르게 하기 위해 상품의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를 시도한다. 멀쩡한 상품을 진부한 것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새 상품을 사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소비자가 ‘신상’을 욕망하듯 영적 소비자도 더 새롭고 자극적인 영성 상품을 끝없이 욕망하기에 영적 힐링 상품의 유행 주기는 갈수록 더 짧아지고 빨라진다. 


    신자유주의적 종교의 영성 상품은 신자유주의의 근본교리인 탐욕과 이기적 개인주의를 필수 요소로 내장한다. 첫째, 탐욕의 영성은 노골적으로 외적 성장과 물질적 성공을 욕망한다. 물질주의적 탐욕에 중독된 종교에게 자발적 가난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죄’다. 예수는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누가복음서」 6:20)라고 가르쳤지만, 오늘의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없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안개의 주식”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부유한 자가 천국을 산다(buy and live heaven). 


    둘째, 이기적 개인주의의 영성은 신자유주의 속에 살아가는 개인들이 사회적 고통을 개인적으로 해결하듯 종교적 깨달음과 구원도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영성의 목표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소승(小乘)적 깨달음’이고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개인구원’이다. 그것은 안개 속에서 쓰러진 동료 인간을 돌보지 않고 ‘나 홀로’ 영적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이런 영적 이기주의는 물질적 이기주의만큼이나 맘몬적이다. 타자중심성, 관계중심성을 지향하는 종교 본연의 저울에 달아보면, 자기만의 내적 평화를 누리려는 욕망과 자기만의 외적 풍요를 즐기려는 욕망의 무게는 같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리면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오늘의 종교는 ‘도착적’ 종교다. 종교를 가장한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종교는 겉으로는 세상과 담쌓은 것처럼 위장하지만, 실은 뼛속까지 세상적 탐욕과 이기에 물들어 있다. 그런 탐욕적, 이기적 영성은 외적 안녕도 내적 안심도 줄 수 없다. 인간을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평화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불안을 이용해 맘몬의 거대 신전을 세운다. 사회적 불안의 총량이 임계치를 넘어버린 시대에 물질적, 영적으로 ‘나 홀로 풍요와 평화’를 욕망하게 하는 종교의 영성은 여전히 ‘인민의 아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적 영성은 신자유주의적 탐욕과 이기의 ‘나 홀로’ 영성과 어떻게 다를까?


사회적 영성


영적 인간은 영적 체험이 깊을수록 일상 속에서 타자를 위한 윤리적 삶을 산다. 그것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자연스러운 발로에서다. 영적 인간의 윤리적 삶은 억지로 뽑아내는 ‘추출’이 아니라 저절로 차서 흘러넘치는 ‘유출’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바울이 말하는 성령이 맺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갈라디아서」 5:22-23)의 열매는 모두 일상에서 필요한 윤리적, 관계적 덕목들이다. 불교의 영적 수행 단계를 표현한〈심우십도(尋牛十圖)〉의 마지막 그림 ‘입전수수(入廛垂手)’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시장으로 들어가 손을 내미는 수행자의 윤리적 이타행(利他行)을 보여준다. 


    그 구조에서 보면 ‘사회적 영성’의 명사인 ‘영성’은 전통적 영성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전통적 영성도 종교의 이타적 윤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형용사인 ‘사회적’이다. 형용사는 명사의 시선과 방향을 규정한다. 사회적 영성은 영성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좀 더 책임 있고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것이다. 사회적 영성의 수행법도 새로운 영적 테크닉이 아니라 전통적 영성 수행법을 새로운 방향, 곧 자신과 사회를 함께 변혁하는 방향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 시선과 방향의 ‘사회적’ 영성은 다음의 네 가지 기본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회적 영성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종교의 목적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종식하는 것이다. 영성도 그 목적 아래 있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을 대가로 안락을 누리는 탐욕의 영성과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이기적 개인주의의 영성은 영성의 본래 목적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을 알고 느끼지 못하면서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 사회적 영성의 출발점은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와 접촉하고 그들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에 눈을 뜨는 ‘사회적 세례’이다. 그 세례를 통해 거듭난 사람은 불이(不二)적, 관계적 감수성으로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연대한다. 불이적 관계성에서 보면 타자와 무관한 ‘나’는 없다. ‘관계’가 나다. 그래서 비말라키르티는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불이적 관계성에 기초한 사회적 영성은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 우는 공명의 영성, 함께 아파하는 공감의 영성, 함께 사는 공존의 영성으로 나타난다. 


    둘째, 사회적 영성은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회적 지혜’에 기초한다. 


    전통적 영성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주로 개인의 내면을 응시한다. 물론 사회적 영성도 내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사회구조만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도 유혹하여 지배하는 종교로서의 신자유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야 한다. 이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수천 년 동안 탐구해 온 종교는 인간의 내적 탐욕, 분노, 무지가 어떻게 외적으로 표현되는지 이해하는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응시만으로는 고통의 복합적 원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영적 고통은 사회적, 경제적 조건 때문에 초래되거나 악화될 때가 더 많다. 모든 인간은 고통을 겪지만 사회적, 경제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고통을 겪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는 ‘마음분석’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사회분석’도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종교는 사회과학과 대화함으로써 '사회적 지혜'를 길러야 한다.


    셋째, 사회적 영성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선다. 


    전통적 종교의 영성은 세상을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도피적 영성이나 세상과 담을 쌓는 자폐적 영성이 지배적이다. 그리스도교는 “교회 밖에 구원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것을 교리화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켰고, 불교도 출세간적 수행을 더 중시해왔다. 이러한 전통적 영성과 달리 사회적 영성은 “세상 밖에 구원 없다Extra Mundum Nulla Salus”(Edward Schillebeeckx)고 선언한다. 사회적 영성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영적 수행과 구원을 위해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 아니다. 세상이야말로 영적 수행과 구원의 장소다. 숲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와 사막에서 유혹을 이긴 예수가 고통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 그 본보기다. 그들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들의 수행을 완성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넘어서는 사회적 영성은 ‘지금 여기’를 열반Nirvana과 하느님 나라Basileia가 이루어지는 때와 곳으로 만든다.            


    넷째, 사회적 영성은 일상의 모든 경험을 수행으로 삼는다. 


    영성의 신비는 비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아니 일상의 신비를 발견하고 체험하는 것이 영성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영성은 일상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일상에 뿌리내리고, 일상에 도전하고, 일상을 변혁한다. 이런 일상적 변혁으로서의 사회적 영성의 수행법은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마음챙김으로 번역되는 팔리어 sati는 “잊지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의 몸, 생각, 느낌,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챙겨 알아차리며 하는 일상의 모든 것이 수행이다. 선가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을 모두 선(禪)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뜻이다. 이 마음챙김은 불교만의 수행법이 아니다. 모든 종교 안에, 그리고 종교 바깥에도 마음챙김이 있다. 또한 사회적 영성의 마음챙김은 통전적이다. 명상과 활동, 종교적 신앙생활과 일상적 사회생활, 종교와 정치의 통속적 이원론을 깨뜨린다. ‘사회적 마음챙김’에서는 저항이 곧 기도가 된다. 1965년 3월 21일, 미국 앨라배마 주 셀마시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 등과 함께 흑인민권운동 행진에 참여했던 랍비 아브라함 죠슈아 헤셸이 고백한다. 


우리에게 그 행진은 저항이며 기도였습니다. 물론 다리는 입술이 아니고 걷는 것은 무릎 꿇는 것이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의 다리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말없이도 우리의 행진은 예배였습니다. 나는 내 다리가 기도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믿음의 도약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변화’에 대한 믿음이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변화 발전한다는 것을 역사 실증적으로 밝혔고, 우리의 과제는 단지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to change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가 역사 속에 합법칙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진 것처럼 근대 자본주의도 영원불멸할 수 없으며, 새로운 사회는 변화를 위한 주체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통찰은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열정을 갖게 했다.  진보(進步)[명사]: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국어사전도 사회의 변화에 대한 추구를 진보의 핵심 가치로 설명한다. 


   그런데 오늘의 진보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정말 믿고 있는가? 안타깝지만, 서동진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자는 우파이고, 좌파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다양한 개선을 통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며 세계를 ‘알려고만’ 한다”고 꼬집는다. 보수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진보는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테제―“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가 뒤집혔다.


   세상을 바꾸지 않고 알려고만 하는 자에게 열정이 있을 리 없다. 열정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자의 것이다. 서동진은 열정은 진보가 아닌 보수의 것이 되었다고 탄식한다. 새누리당〈보수혁신특별위원회〉의 “보수는 혁신합니다”라는 붉은색 표어나, 지난 해 세월호 참사 이후 6.4지방선거 때 붉은 잠바를 입은 채 “도와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읍소하던 그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유치하지만 붉은색만큼이나 열정적이었다.


   지금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되찾는 것이다. 특히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 종교인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이 절실하다. 그 믿음의 도약이 바로 종교경험의 핵심이다. 불교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해체적 무상(無常)anicca의 지혜를 갖고 있고, 그리스도교는 지상의 모든 체제를 상대화시켜버리는 전복적 종말eschaton신앙을 가지고 있다. 변화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능성을 찾고, 희망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지키는 믿음의 도약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진리에서 보면 자본주의의 영원 불변성/불멸성을 믿는 것은 ‘무지’이며 ‘이단’이다. 만약에 오늘의 종교가 진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이 변화에 대한 희망, 전복적 삶을 살아갈 열정을 갖게 하는 믿음의 도약이지 않을까?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제도종교가 세상을 구원할 가능성은 없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종교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가 있는 곳에는 무조건 희망이 넘쳐 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강력한 동맹 세력이며 하청 종파인 오늘의 종교는 사회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대상이다. 종교는 오늘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다. 그러니 종교의 당면과제는 “인민의 아편”으로 작용해온 죄악을 참회하고, 비인간적 세계의 인간화를 위해 싸워온 이들, 종교인들보다 더 종교적인 사회변혁 주체들로부터 겸손히 사회적 영성을 배워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영성은 종교가 사회에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종교가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영성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제도종교의 탐욕적, 이기적 영성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해방의 영성’은 ‘영성의 해방’이라는 정화를 거쳐야 한다. 그것이 “안개의 성역”에서 맘몬을 섬겨 온 종교가 죄를 씻는 길이며 구원받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