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방, 박지웅

from FAV POEMS 2016.10.24 12:33

연필과 종이뭉치를 던져주고 나는 자주 어떤 문장에 희망을 감금하였으나 그는 매번 문장에 쥐구멍을 내고 달아났다 볕든 쥐구멍을 몇 개의 낱말로 메운 뒤 다시 그를 협소한 문장 안에 가두었다

 

너는 없다

 

좁은 문장은 벽과 바닥이 단단했다

빈틈이라고는 도무지 없었다 그러고 나는 비누처럼 웅크렸다

그는 없는 손을 뻗어 나를 문지르고 없는 얼굴을 씻고

없는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다시 어디론가 나가려고 행동하였으니

없는 꿈을 꾸는 그가 나는 다만 우스울 뿐이었다

그는 없는 옷을 차려입고 없는 몸을 일으켜 없는 거울을 향해

없는 미소 한번 지어보이고 없는 신발을 신고

없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없어져버렸다

 

나는 방 안을 쥐새끼처럼 뛰어다녔다

없는 그가 빠져나간 없는 방을 나는 서둘러 지웠다

더 정교하게 썼다

 

없는 방도 없는 방에 너는 없다

 

그러나 그는

없는 방도 없는 방에 앉아 없는 손도 없는 손을 뻗어 없는 문도 없는 문을 열었다

굳이 말하자면 실은 없어진 줄도 모르게 없어졌다

 

 

나는 없는 방도 없는 방에 없는 창을 내고 없는 하늘에 없는 달을 띄웠다

없는 어린왕자처럼 없는 의자에 앉았다

까마득한 발아래 볕든 쥐구멍처럼 지구가 떠 있었다

아니 뚫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랫동안 치열했다

 

나는, 나와

없는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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