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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 POEMS

이웃 사람, 김행숙



곧 가스불을 꺼야 할 독신자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이다. 고깃국물이 졸아들고 검은 간장 한 방울처럼 진해지는 것이다. 불꽃 냄비처럼 모든 손잡이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란 가스불을 끄고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가볍게 음식을 먹고 천천히 그릇을 씻는 것이다.

 

나는 맨발로 국제공항에 떨궈지고 싶지 않았다. 유리의 성에 지워질 듯 지워질 듯 어른거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익히고 익숙해지고 드디어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까지 수줍은 미소를 띤 채 어정거리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 동네에서

 

오전에 산책하고 오후에 산책하는 나의 삶을 지키고 싶다. 평범하고 고독한 저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고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앞발을 감추고 발발이처럼 짖을 때까지 나는 오후에 산책하고 고요한 새벽에 산책하는 삶을 살아왔다.

 

제때 가스불을 끄고 사랑을 끄고 희망을 끄고 살아온 것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온 것이다. 곧 가스불을 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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