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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 POEMS

월동, 조 정



햇빛은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보는 버릇이 있다 

셔츠에 좀이 슬어 잔구멍이 났지만

가슴을 파먹고 옮겨가는 벌레들을 막을 수 없다

숫돌을 꺼내 심장을 간다

무딘 채로 버틸 수 있다면 끝내 버텨보는 것인데

벼르고 별러도 뱃머리를 댈 곳이 없는 

길이 그물에 걸린다   

  

겁먹은 바람이 우편함에서 

납기가 지난 사망 통지서를 집어다 준다 

납기를 대지 못한 생은 몇 퍼센트의 연체료를 가산하는지

잘 벼린 정맥으로 

북극성 귀퉁이에 풀어진 나사를 조인다

추위에 새들마저 길을 잃으면 큰일이다


냉랭하게 마음을 사리고 잠든 뱀이 소스라친다 

수화기의 끈을 풀어놓고

새들이 내려앉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올해는 果樹도 쉬는 해다 

해가 찢어진 그물을 당기며 하혈을 한다 

해초 무침에서까지 나프탈렌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폐선의 머리를 쪼개 불을 피운 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가슴이 아픈 물고기를 모조리 붙잡아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낡은 절을 만나면 그 가슴에 들어가 못을 줍고 

찬물을 떠서 마신다

바위에 노랑 각시 붓꽃 뿌리가 얼룩져 있다 

꽃은 죽어서도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홀리는 버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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